김영환 전 국회의원 학력 나이 고향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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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김영환 전 국회의원 학력 나이 고향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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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은 제3대 과학기술부 장관과 제15·16·18·19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학생이던 김영환은 1977년과 1980년 두 차례 학교에서 제적 당했다. 1977년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 위반 등으로 총20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1980년 2월 29일 일반복권 되었다. 김영환은 학교에서 쫓겨난 뒤에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며, 전기공사기사 1급, 소방설비기사 1급 등 6개 자격증을 취득한 전기기술자다. 전기기술자로 활동하다가 신한일 전기에서 단순조립공으로 활동하면서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1987년 '김해윤'이란 필명으로 첫 번째 시집 "따라오라 시여"를 냈으며, 이 시집에 '단순조립공의 하루'이라는 시는 훗날 민중가요 '단순조립공'으로 만들어져 큰 사랑을 받기도 했다. 1988년 15년만에 연세대 치대를 졸업하고서 치과의사로 개업했다.

1995년 노동운동 시절부터 노선을 같이하던 김근태와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96년도에는 국민회의 공천으로 안산 갑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내리 2선을 기록했다. 2001년도에는 김대중 정부 최연소 과학기술부 장관에 임명됐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이 열린우리당과 분당되는 당시 '분당없는 신당, 분당없는 개혁' 노선을 견지했으며,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자 추미애, 조순형과 함께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했다. 새천년민주당에서 대변인, 정책위의장,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다.

2004년 탄핵역풍으로 낙선 후 그는 북촌 한옥마을에 최초의 한옥치과 '이해박는집'을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이후, 성북동에 정원이 있는 치과, 안산에 최초의 창고형 병원인 '치과, 이해박는 집'을 만들어 이해박는집 대표원장으로 지냈다.

2008년 1월 민주당을 탈당했다가 곧이어 3월에 복당을 신청, 그러나 복당이 불허되자 2008년 18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9년 10월 28일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송진섭 후보를 꺾고 5년 6개월 만에 안산상록 (을) 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그는 4대강 사업에 반대해 공사현장을 직접 답사한 후 장시집 '흐르는 강물에 갈퀴손을 씻으라'를 발간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010년 6월 18대 국회 하반기에 지식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대중소기업 상생,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해 노력하면서 동료의원 90명이 함께 하는 '중소기업과 골목상권을 지키는 의원모임'을 만들어 대표를 맡았다. 특히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 및 의무휴업을 골자로 하는 유통산업발전법, 대중소상생법, 소상공인지원법 등을 입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후쿠시마 원전 사태, 2011년 9월 대규모 정전사태 당시 과학기술과 원전에 대한 지식, 전기기술자로서의 경험 등을 살려 의정을 펼쳤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4선이 되었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여 국민의당에 입당하였고, 4.13 20대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안산 상록을에 출마하였지만, 더불어민주당 김철민 후보에게 399표 차로 뒤쳐저 낙선하게 되었다.

김영환
1955년 5월 27일 (64세)
충청북도 괴산 출생

학력
청천초등학교
청천중학교
청주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사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공공발전 전공, 경제학 석사 (학위논문명 - 금용안전망 체계의 발전방안 연구 : 예금보험공사 자산관리공사 분할을 중심으로)

경력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
새정치국민회의 정세분석실장
제3대 과학기술부 장관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의장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이해박는집 대표원장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위원장
국민의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
국민의당 경기도당위원장
국민의당 사무총장
국민의당 최고위원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미래통합당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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