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학력 나이 고향 프로필 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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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만원 학력 나이 고향 프로필 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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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은 육군사관학교를 22기로 졸업,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고 1987년 육군사관학교에서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본관은 충주(忠州). 1981년과 1997년 검찰 기록 18만 쪽을 5년간 연구하여 5.18 민주화운동은 폭동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저서와 온라인 칼럼에서 표현하고 있다. 지만원은 5.18 민주화운동이 '북한의 특수군이 침투'했다고 주장했으며 유튜브에 그에 대한 주장이 담긴 동영상과 게시글을 올리고 삭제되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다.그러나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군인 시절에는 1967년부터 1971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고, 1977년부터 1981년까지는 미국 해군대학원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국방연구소 연구원 시절에는 율곡 사업 중 방공자동화사업의 문제점과 부품의 결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미국 해군대학원 부교수,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을 역임했다.

정치 경력으로는 시스템미래당 대표로 활동하였고, 1990년부터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 소장, 시스템클럽의 대표, 대한민국대청소 오백만야전군의 의장 등을 맡고 있으며, 언론활동도 하고 있다. 교육 경력으로는 USNPS 부교수, 인하대학교 교수, 경희대 겸임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지만원은 1942년 12월 27일 강원도 횡성군에서 태어났다. 동생만은 교육을 시켜야 된다는 넷째 형의 노력으로 횡성군 일신국민학교(현 일신초등학교)에 입학, 그 뒤 일신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면사무소 소재지 인근에 있던 지제중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 학교를 중퇴했으며 형들을 따라 서울로 이주, 서울 동대문구 장안평에서 독방을 얻어 노동일을 하는 큰 형 집에 머무르며 신문도 배달하고, 철판을 두드려 자동차를 만드는 이른바 서비스공장도 다니고, 건설현장에 가서 여러 가지 일을 하기도 했다. 그 뒤 서울 고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3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했다.

그 뒤 용두동에 소재해 있던 서울 한영중학교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받고, 서울 한영고 야간반 과정에 입학했으며 1961년 한영고 야간반 과정을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는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지망했지만 성적 미달로 떨어졌다.[2] 그 뒤 고전소설, 위인전, 영웅전, 사상계 등 잡지로 나날을 보냈다.

1961년 가을 육군병원 신체검사에서 키가 작다는 이유로 불합격할 뻔하였으나 기적적으로 통과,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에 의하면 육사생도 재학 당시 학과공부보다는 위인전과 고전 명작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1966년 2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22기로 졸업하고 육군소위에 임관되었다. 초임 소위로 부임했을 때 그는 '부대에 배치된 지 몇 개월 만에 부하들을 못살게 구는 고참 대위를 구타했지만 징계를 면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다. 육군 중위로 진급한 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1967년 ~ 1971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백마부대 포병연대에 배속되었으며, 중위 재직 중 포병 대대 포병화력을 담당하는 사격지휘담당장교, 사격통제담당장교로 보임되었다.[3] 그는 베트남 파병 중 그는 투이호아 지역 전투에 참가하였다. 1969년 초 귀국, 5월 육군관리참모부 예산회계처장 전속부관을 역임했다. 한편 귀국 직후 우연한 일로 당시 고위 정치인과 관련있던 정인숙의 오라비를 구타했다가 국무총리 정일권이 당시 육군참모총장 김계원에게 "지만원 중위를 처벌하고 결과보고 할 것"을 주문했는데 정복을 입고 국무총리실로 찾아가 담판을 내고 정인숙의 집으로 찾아가 정인숙과 담판을 하여 없던 일로 했다 한다. 이를 두고 후일 그는 기적이라 회고하였다.

1969년 9월 1일 (임)대위로 진급했으나 다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 사이공 파월한국군 사령부 전속부관이 되었다. 이후 대위로 재임 중 포병연대 관측장교, 화력지휘담당장교, 작전장교, 월남군청연락장교, 포대장(중대급) 등을 역임하고 1971년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육군대학 전략정보과정(1년)을 수료하였다.

이후 육군 제9보병사단(9사단) 제52포병대대 제2포대장, 1972년~1974년 합참정보국(현, 정보본부) 해외정보 수집담당장교, 1976년~1977년 국방 PPBS 도입 연구요원 등을 역임하고 1977년부터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다.

장교로 복무하던 중 미국으로 유학, 수학의 기초과정부터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해군대학원(Naval Postgraduate School)에서 행정과학(Administrative Science) 석사과정(1974년~1975년)을 마치고 1975년 미국 해군대학원 행정과학석사를 받았다.

1975년 해군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 경영과학(Operation Research) 박사학위(1977년~1980년)를 취득[5][6][7] 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그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시스템 수학의 기초과정부터 시작해서 박사 논문까지 끝내야 했기 때문에 그에 따르면 첫학기부터 중압감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이는 위장병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한다.

지만원
1942년 12월 27일 (77세) 강원도 횡성 출생

학력
1966년 육군사관학교 22기 학사
1967년 육군공병학교 졸업
1968년 육군보병학교 졸업
1969년 미국 미주리 군사종합학원 졸업
1970년 미국 버지니아 군사종합학원 졸업
1972년 육군대학 전략정보과정 1년 수료
1975년 미국 해군대학원(NPS) 행정과학석사
1980년 미국 해군대학원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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