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일 :1966년 4월 24일 (52세)
출생지 :전라남도 장흥군
신체 :176cm
학력 :용문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 / 학사)
종교 :천주교(세례명: 프란치스코)
소속 정당 :더불어민주당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6, 17
가족 관계 :아내 김소희, 딸 임동아
현직 :무직
병역 :제2국민역
약력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3기 의장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
열린우리당 원내 대변인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제3차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
대통령비서실장
1966년 4월 24일생으로 전라남도 장흥군이 고향이다. 이후 상경하여 서울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과 1학년 때, 노래패에 가담하면서부터 운동권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고, 1988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이 되어 1989년 한총련의 전신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일명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으면서 학생 운동권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 주도한 것이 바로 임수경의 불법방북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따른 경찰 수배에서 도피하다가 결국 1989년 말 체포, 3년 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당시 임종석은 1년 가까이 수배를 따돌리며 도망쳤고, 전국에 10만 장의 수배 사진이 붙었으며, 임종석 담당 형사(청량리 경찰서 신중현)가 과로로 사망할 정도였다는 후문이 있다. 교묘히 수배망을 따돌리던 임종석은 '임길동'이라 불렸다.
1990년 12월 26일 대법원에서 임수경의 밀입북을 몰래 도와 징역5년, 자격정지 5년 판결을 받았다. 유죄판결에 따른 실형으로 인해 공식적 병역사항은 미필이다. 1993년 5월 원주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8월에 한양대 4학년에 복학하였고, 1995년 8월 대입 10년 만에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총동문회장상과 공로상을 수여받았다.
정치 입문
1994년 말부터 시민운동 쪽에서 활동하였다. 가까운 동료들과 만든 청년활동단체인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직을 맡았다.
같은 전대협 간부 출신인 우상호 의원의 말에 의하면 10여년동안 정계에 진출하지 않기로 당시 학생운동권 간부들이 결의하고 시민운동을 주 활동무대로 삼으면서 기초체력을 길렀다고 한다.
1999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대규모 사면복권 당시 복권되면서 출마 자격을 얻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창 386 운동권 출신 영입이 활발할 때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서울 성동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4선의 이세기 한나라당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다만, 임종석 자신은 의외로 전대협 의장 출신이라는 화려한 경력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원은 되지 못했는데,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도 했다지만, 당내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거나 거물급 의원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정계 입문 후 임종석의 의정활동은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인권법 제정 반대, 대북 교류사업 등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다.
임종석은 노무현 정부 당시 대북송금 특검수사에도 적극 반대했다. 대북송금 사건은 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5억 달러를 불법송금한 사건을 말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가결을 저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위 영상은 당시 YTN 돌발영상의 장면이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뉴타운 열풍에 밀리면서 한나라당 김동성 후보에 밀려 낙선했고, 당내에서 활동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출범 당시 당 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문제는 이 당시 임종석이 정치자금법 문제로 재판에 걸려 있었다는 점. 결국 19대 총선 직전 나온 1심 판결에서 유죄가 선고되면서 총선 출마가 좌절되었다. 사실 출마 자체는 할 수도 있었지만, 재판 문제로 인해 공격을 받을 것 같자 결국 포기한 것. 한명숙 당시 대표가 끝까지 만류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는 사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사무총장으로서 공천권과 관련하여 소위 노이사 공천(친노-이대-486 위주 공천)을 주도했다는 공세도 한몫 했다. 성동구 을 지역구는 그의 친구인 홍익표 교수에게 넘어갔고, 그는 사무총장직도 내놓게 되었다. 그의 사퇴 원인이 된 정치자금법 문제는 2심에서 무죄로 뒤집히면서 최종적으로 무죄 선고가 났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시장 캠프에서 활약하면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2015년까지 재직하였고, 때문에 박원순계의 대표주자 정치인으로 분류되었다.
총선 출마를 위해 정무부시장 직을 내려놓은 후, 은평구 을 출마를 선언한다.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정계의 거물인 이재오와 겨뤄서 정치적인 재기를 모색하였는데, 그만 당내 경선에서 무명의 신인이지만 은평구 내에서 기반을 착실하게 만들었던 강병원 후보에게 패하면서 출마 자체를 하지 못했다.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 많은 기대를 받으며 정치에 입문했지만, 18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 세 번의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면서 10년 넘게 원외에 남게 되었다. 임종석과 함께 국회의원 자리에 도전한 다른 박원순계 정치인들도 기동민을 제외하면 경선과 본선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물 간 정치인으로 잊혀지는 줄 알았는데 문재인 대통령 집권 아래에서 초대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무게감있는 행보와 비중으로 연일 야당의 공격과 공세에 맞서면서 업무를 수행했다.
2019년 1월에 대통령 비서실장직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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